<시 읽기·우리말·문학자료> 4322

폐교 /김규학

폐교 김규학 한때, 천 명도 넘던 전교생들 사라지고 그 많던 선생님들 뿔뿔이 흩어지고 궂은일 도맡아 하던 순이 아버지도 가버렸다. 모두 다 떠나버려 적막하고 스산한데 집 나간 아들 기다리는 어머니 심정으로 검버섯 창궐한 학교만 그 자리에 붙박여 있다. 나팔꽃이 휘청대며 국기 봉을 부여잡고 그늘만 넓혀가던 플라타너스 나무도 밤사이 떠나버릴까 까치둥지가 짓누른다. 좀이 쑤신 학교도 툭툭 털고 일어나 하루빨리 이 산골을 벗어나고 싶겠지만 날마다 담쟁이덩굴이 친친 주저앉힌다. [2021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플라멩코 /최정희

플라멩코 최정희 스페인으로 떠날 거예요 플라멩코를 배우려고요 내 핏속의 역마살 자유를 꿈꾸어요 붉은빛 보헤미안의 꿈 우린 모두 집시였죠 영원한 안식이란 오직 죽음뿐인걸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오늘 그리고 내일 인생은 끝없는 여정 길 위의 삶이에요 희노와 애락들, 모든 것이 행복이듯 하루의 끝 석양이 아름다운 이유이죠 고독한 영혼의 언어 플라멩코를 춰 볼까요 [2021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벗고싶은 봄 /조규하

벗고싶은 봄 조규하 코로나 바이러스 마스크 5부제가 담쟁이 넝쿨처럼 담벽을 둘러쳐도 빈손을 탈탈 털면서 제 집으로 가는 봄 내 맘이 네 맘이니 맘 편히 가지란다 더불어 같이 갈까, 미래를 통합할까 정의를 공화하려는 선거판에 열띤 봄 한 끼 밥은 건너가도 맨입으론 못 나가요 거리마다 입을 막고 거리를 두는 사이 우리는 서로 몰라요 각자가 따로지요 요일마다 수량 한정 봄날도 매진인데 선착순 이라는 말 불안하기 짝이 없어 언제쯤 입을 벗나요, 입술도 맞출까요 [2021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금속성 이빨 /김남미

금속성 이빨 김남미 허기 들린 포크레인 산동네를 잠식한다 비탈에 선 집과 가게 밥 푸듯 퍼 올려 뼈마디 오도독 씹는 공룡 같은 몸짓으로 찢겨져 너덜대는 현수막 속 해진 말들 무너진 담벼락은 철근마저 무디게 휘어 날이 선 금속성 이빨 하릴없이 보고 있다 이주민 행렬따라 먼지구름 피는 도시 아파트 뼈대들이 죽순처럼 솟아오를 때 만삭의 레미콘트럭 양수 발칵 쏟아낸다 [2021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다시 슬도에 와서 /설경미

다시 슬도에 와서 설경미 얼마나 그리워야 소리로 젖어들까 떠나보낸 이름조차 이마를 두드리는 곰보섬 뚫린 바위섬 해무가 휘감긴다 아기 업은 돌고래 암각화 뛰쳐나와 바다와 맞닿은 곳 제 그림자 세우며 물살로 솟구치는 몸 허공을 겨냥한다 바다로 가는 길이 다시 사는 일이어서 견디며 삼킨 울음 앙금으로 남은 말 한겹씩 걷어낸 난간 간간이 말려놓고 구멍 난 살점마다 촘촘히 홈 메우듯 그제야 돌아앉아 거문고를 타는 섬 얼마나 그리워해야 소리로 젖어들까 [2021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물결을 읽다 /김재호

물결을 읽다 김재호 어시장 뒷골목의 기억은 파랑이다 바다가 심장을 통째로 내어놓은 듯 난파선 퍼질러 앉은 저 장엄한 죽음이여 장황한 설명이나 단출한 부연 없이 물결처럼 그어지는 운명을 받아 든다 파도가 가르쳐주던 거스름의 무늬를 꿈과 이상은 미완의 섬, 현저한 온도 차 제 삶에 일어나는 파문을 다독이며 조각난 물빛 삼키듯 처분만 기다리네 언젠가 푸르던 그 바다로 돌아가면 배 밑에서 춤추며 퍼덕이는 날개 접고 통통배 갯배 머리에 장승처럼 서리라 ―

숫돌을 읽다 /허정진

숫돌을 읽다 허정진 고향 집 우물가에 등 굽은 검은 숫돌 지문이 없어지듯 닳고 닳은 오목 가슴 그리움 피고 지는 듯 마른버짐 돋는다 대장간 불내 나는 조선낫 집어 들고 제 몸을 깎여가며 시퍼런 날 세우면 뽀얗게 쌀뜨물일 듯 삭여가는 등뼈들 새벽녘 고요 깨고 쓱싹대는 숫돌 소리 가만한 한숨처럼 은결든 울음처럼 짐 진 삶 견디어 내는 낮고 느린 수리성 묵직한 중량감 든든한 무게 중심 자식들 앞날 위해 새우잠 참아내며 평생을 여백으로 산 아버지를 읽는다 [2021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나는 5.18을 왜곡한다' /최진석

'나는 5.18을 왜곡한다' 지금 나는 5.18을 저주하고, 5.18을 모욕한다. 1980년 5월 18일에 다시 태어난 적 있는 나는 지금 5.18을 그때 5.18의 슬픈 눈으로 왜곡하고 폄훼한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많이 서서 죽기를 원하면서 그들에게 포획된 5.18을 나는 저주한다. 그 잘난 5.18 들은 5.18이 아니었다. 나는 속았다. 금남로, 전일빌딩, 전남도청, 카톨릭센타, 너릿재의 5.18은 죽었다. 자유의 5.18은 끝났다. 민주의 5.18은 길을 잃었다. 5.18이 전두환을 닮아갈 줄 꿈에도 몰랐다. 나는 속았다. 3.1, 4.19. 6.10, 부마항쟁의 자유로운 임들께 동학교도들의 겸손한 임들께 천안함 형제들의 원한에 미안하다. 자유를 위해 싸우다 자유를 가둔 5.18을 저주한다. 그..

뭐든지 다 합니다 /변현상 외 2편

뭐든지 다 합니다 /변현상 1. 정년퇴직 박갑수 씨 단독주택 대문에도 비 젖은 고지서가 연체로 꽂히면서 파도가 들이닥쳤다 침몰하는 어선 한 척 2. 콧물감기 훌쩍이는 어둑새벽 입동 무렵 골목 어귀 녹슨 트럭 어때 높은 인력 시장 대처분 부도난 제품 벽보가 또 붙었다 3, 전무이사 상무이사 다 지나간 명함일 뿐 구명조끼 입을 채로 구명탄은 쏘아야지 일용직 가능합니다 뭐든지 시켜주세요 건망증을 또 까먹다 파일이 또 삭제됐다 로그인하다 끊긴 폴더 달빛 지운 까만 밤이 전두엽에 스며들면 대뇌의 모든 전원이 통째로 정전된다 입김 어린 차창 위에 손가락으로 쓴 계약서 한눈팔다 엔터키 친 바이러스 먹은 PC 감염된 파일이 된 양 살아날 줄 모르네 공짜 같아 막 눌렀던 무제한 테이터처럼 게워내지 못하는 할인 기간 넘긴..

너라는 비밀번호 /정명숙

너라는 비밀번호 정명숙 너를 열 때 언제나 처음부터 진땀이 나 쳇바퀴 다람쥐처럼 단서를 되집는다 비밀은 물음표 앞에 굳게 닫혀 덧댄 빗장 하루에도 여러번씩 바뛰는 네 취향은 여기저기 흩어놓은 서투름과 내통해도 자물쇠 가슴에 숨어 드러나지 않는다 네 날씨 풀어내려 구름 표정 살펴보다 숨겨둔 꽃대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불현듯 네가 열린다 꽃숨어리 활짝 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