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동시조♠감상해 보자 405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윤제림

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 윤제림 "거북이냐, 너 지금 어디냐?... 딴 애들은 아까아까 다 왔다" 전화하는 목소리가 하도 커서 온 세상 사람들 다 알게 생겼어요 거북이만 아직 안 오고 딴 애들은 아까아까 다 와서 거북이를 기다리고 있어요 한 아이는 전화를 하고, 한 아이는 담배를 피우고, 한 아이는 신발 끈을 고치고, 한 아이는 커피우유를 마시고 있어요 "거북이 얘는 언제나 지각이라니까!" 동트는 새벽, 국립공원 매표소 앞 등산복 차림의 할아버지 넷이 거북이 한 마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동시집『거북이는 오늘도 지각이다』(문학동네, 2018)

그때는 아팠지 /문현식

그때는 아팠지 문현식 셋이 앉아서 돌아가며 웃긴 얘기를 하나씩 하기로 했다 나는 친구와 한 자전거로 내리막길 달리다가 자갈밭에 굴러 피투성이가 되었던 일을 말했다 유진이는 계단에서 아래로 날아 떨어져 턱이 퍼렇게 멍들어 수염 난 어른처럼 얼굴이 변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재민이는 교통사고로 입원했는데 그때 다친 발가락이 비가 오는 날이면 간지럽다고 했다 우리는 웃긴 얘기를 하기로 했는데 아팠던 얘기를 하며 웃었다 ―동시집『오늘도 학교로 로그인』(창비, 2021)

진화 /박혜선

진화 박혜선 우리에 갇혀 평생 주는 사료를 받아먹던 소들은 다리를 반납하기로 했어 몸뚱이만 살찌우면 그만 입만 있으면 되었지 뒹굴뒹굴 누워 먹으며 피둥피둥 살이 오르면 되었지 흙바닥에 발자국이 찍히는 기분 따위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소들은 좁은 칸을 버티고 서 있는 슬픈 다리는 이제 버리기로 했어 ―동시집『바람의 사춘기』(사계절, 2021)

햇볕 한 장 /백민주

햇볕 한 장 백민주 요양원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 한 장 손수건인 양 무릎에 얹어 놓고 할머니는 자꾸 창밖 공터에 내려앉는 햇볕을 아까워했다. 뭐라도 내어 말리지. 아까운 볕을 놀리네. 저 귀한 볕을 한평생 공짜로 썼으니 고맙게 잘 살다 간다며 ... 햇볕 한 장을 무릎에 덮었다 머리에 덮었다 했다. ㅡ동시집『할머니가 바늘을 꺼내 들었다』(책내음,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