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66

신경림 시선집 1....40.41.42.42.44.45

40 묘비墓碑 쓸쓸히 살다가 그는 죽었다.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그는 묻혔다. 바람이 풀리는 어느 다스운 봄날 그 무덤 위에 흰 나무비가 섰다. 그가 보내던 쓸쓸한 표정으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비는 아무것도 기억할 만한 옛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언듯 거멓게 빛깔이 변해가는 제 가냘픈 얼굴이 슬펐다. 무엇인가 들릴 듯도 하고 보일 듯도 한 것에 조용히 귀를 대이고 있었다. 08.01.04/아침 9시 24분 41 심야深夜 1 쓸쓸히 죽어간 사람이여. 산정에 불던 바람이여. 달빛이여. 지금은 모두 저 종 뒤에서 종을 따라 울고 있는 것들이여. 이름도 모습도 없는 것이 되어 내 가슴속에 쌓여오고 있는 것들이여. 2 어느날엔가 나도 그들과 같은 것이 되어 그들처럼..

2008 필사 시 2021.01.20

고정희 시집....일곱째거리-통일마다 /끝

일곱째거리-통일마다 분단동이 눈물은 세계 인민의 눈물이라 1. 에미 그린 분단동이 애비 그린 분단동이 해동 조선국 통일 어머니 북방 남방 통일 어머니 동방 서방 해방 통일 어머니 해로 연사는 기사년이옵고 달로는 정월 날로는 대보름올시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중 모든 소원, 모든 축원, 모든 가슴 아픈 사연 모다놓고 휘영청 밝은 대보름 달빛 아래 천의 강 만의 강에 흐르는 달빛 모아 육천만 겨레 동포 통일염원 드립니다. 기사년 새해 벽두 천 갈래 만 갈래 흩어졌던 뜻을 모아 합심 일심으로 겨레 뜻으로 동포 뜻으로 통일축원 드립니다 혈육의 정으로 육친의 정으로 민족의 정으로 통일기원 드립니다 혼탁한 마음도 수정 같이 맑아지고 살길 없는 캄캄한 인생도 대명천디같이 밝아진다는 대보름 달빛 아래 역사의 뜻으로 민족의..

2008 필사 시 2021.01.20

신경림 시선집 1.....31.32.33

31 실명失明 해만 설핏하면 아랫말 장정들이 소주병을 들고 나를 찾아왔다. 창문을 때리는 살구꽃 그림자에도 아내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막소주 몇잔에도 우리는 신바람이 나 방바닥을 구르고 마당을 돌았다. 그러다 마침내 우리는 조금씩 미치기 시작했다. 소리내어 울고 킬킬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는 아내를 끌어내어 곱사춤을 추켰다. 참다 못해 아내가 아랫말로 도망을 치면 금세 내 목소리는 풀이 죽었다. 윤삼월인데도 늘 날이 궂어서 아내 찾는 내 목소리는 땅에 깔리고 나는 장정들을 뿌리치고 어느 먼 도회지로 떠날 것을 꿈꾸었다. 08.01.03/밤 1시 13분 32 귀로歸路 온종일 웃음을 잃었다가 돌아오는 골목 어귀 대폿집 앞에서 웃어보면 우리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서로 다정하게 손을 쥘 때 우리의 손은 차..

2008 필사 시 2021.01.20

신경림 시선집 1....28.29.30

28 그 겨울 진눈깨비가 흩뿌리는 금방앗간 그 아랫말 마찻집 사랑채에 우리는 쌀 너 말식에 밥을 붙였다. 연상도 덕대도 명일 쇠러가 없고 절벽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은 지겨워 종일 참나무불 쇠화로를 끼고 앉아 제천역전 앞 하숙집에서 만난 영자라던 그 어린 갈보 애기를 했다. 때로는 과부집으로 물려가 외상 돼지 도로리에 한몫 끼였다. 진눈깨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보름께면 객지로 돈벌이 갔던 마찻집 손자가 알거지가 되어 돌아와 그를 위해 술판이 벌어지는 것이지만 그 술판은 이내 싸움판으로 변했다. 부락 청년들과 한산 인부들은 서로 패를 갈라 주먹을 휘두르고 박치기를 하고 그릇을 내던졌다. 이 못난 짓은 오래가지는 않아 이내 뉘우치고 울음를 터뜨리고 새 술판을 차려 육자배기로 돌렸다. 그러다 주먹들을 부르쥐고..

2008 필사 시 2021.01.20

고정희 시집...여섯째거리--대동마다/1.2.3.4

5.노적타령 에헤야 노적이야 어기영차 노적이야 경상도 이노적 이 집으로 들어오소 전라도 싸노적 이 집으로 들어오소 이 논 저 밭 솟은 노적 이 집으로 들여오소 담울담울 쌓인 노적 우뚝우뚝 치뜬 노적 에헤루 노적이야 어기영차 노적이야 위에 노은 마른갈이 밑에 논은 물갈이 한번 갈아 두번 갈아 삼세번 갈아엎어 삼사월에 씨뿌리고 오뉴월에 모를 심어 먼데 사람 듣기 좋게 옆에 사람 보기 좋게 김매고 잡초 뽑아 그 나락이 자라날 제 밑으로는 숙인 가지 위로 뻗은 가지 칠팔월에 새를 쫓아 구시월에 추수 타작 이고지고 날라다가 베눌 삼천 눌렀네 에레루 노적이야 어기영자 노적이야 초간청춘 사춘 베눌 * 이팔청춘 쳐녀 베눌 구십당년 노이니 베눌 오복소복 접시 베눌 높이 솟아 용수 베눌 올망졸망 양산 베눌 에헤루 노적이야..

2008 필사 시 2021.01.20

고정희 시집...여섯째거리--대동마다/1.2.3.4

여섯째거리--대동마당 집치레 번듯하니 민주집이 분명하다 1. 말로 주면 섬으로 받는 사람의 화복대길 아하 사람아 앞앞이 소중한 목숨둥우리 있어 문밖 나가 있는 동안 시시로 궁금하고 들어와 있는 동안 미더운 사람아 보듬아보고 안아보고 치뜰어도* 새록새록 그리운 건 사람뿐이라 많아도 넘치는 법이 없고 모자라도 허전하지 않는 것은 사람뿐이라 서로 눈알 부라려도 칼로 물 베기요 서로 등 돌려도 마음 맞물려 지새는 자웅이라 싸웠다가 돌아서서 웃음으로 악수하고 흩어졌다 달려와서 한뜻으로 맞들고 애 녹였다 불현듯 기쁨으로 넘침이라 아하 사람아 앞앞이 길이 있되 수천리 사무쳐 부르는 길이요 앞앞이 뜻이 있되 억조창생 우뚝우뚝 만나는 뜻이요 앞앞이 본이 있되 어머니 태아 주신 사랑의 본이요 앞앞이 정이 있되 천 가람 만..

2008 필사 시 2021.01.20

신경림 시선집 1....25.26.27

25 페광廢鑛 그날 끌려간 삼촌은 돌아오지 않았다. 소리개차가 감석을 날라 붓던 버럭더미 위에 민들레가 피어도 그냥 춥던 사월 지까다비를 신은 삼촌의 친구들은 우리 집 봉당에 모여 소주를 켰다. 나는 그들이 주먹을 떠는 까닭을 몰랐다. 밤이면 숱한 빈 움막에서 도깨비가 나온대서 칸델라 불이 흐린 뒷방에 박혀 늙은 덕대가 접어준 딱지를 세었다. 바람은 복대기를 몰아다가 문을 때리고 낙반으로 깔려죽은 내 친구들의 아버지 그 목소리를 흉내내며 울었다. 전쟁이 끝났는데도 마을 젊은이들은 하나하나 사라져선 돌아오지 않았다. 빈 금구덩이서는 대낮에도 귀신이 울어 부엉이 울음이 삼촌의 술주정보다도 지겨웠다. 08.12.31/저녁 6시 26분 *복대기 - 광석을 빻아 금을 거의 잡고 난 뒤 방아확 밑바닥에 처진 돌가루..

2008 필사 시 2021.01.20

신경림 시선집 1.....22.23.24

22 이 두 개의 눈은 -어느 석상石像의 노래 원수의 탱크에 두 팔을 먹히고 또 원수의 이빨에 헛바닥을 잘리고 이제 남은 것은 이것뿐이다 이 두 개의 눈. 누가 또 다시 이것마저 바치라는가 아무도 나에게서 이것을 빼앗지는 못한다 이 두 개의 눈은. 지켜보리라 가난한 동포의 머리 위에 내리는 낙엽을, 흰눈을, 그들의 종말을. 학대받는 자와 학대받는 자의 종말을 보기 위하여 내가 지닌 것은 이제 이것뿐이다 이 두 개의 눈. 07.12.31/낮 3시 24분 23 그들 쏟아지는 빗발 속을 맨발로 간다 서로 잡은 야윈 손에 멍이 맺혔다 성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겁먹은 내 얼굴에 침을 뱉는다 흰옷 입은 어깨에 피가 엉겼다 몰아치는 바람 속을 마구 달린다 07.12.31/3시 26분 24 1950년의 총살銃殺 1 ..

2008 필사 시 2021.01.20

신경림 시선집 1....19.20.21

19 그 눈오는 밤에 나를 찾아온다. 창 밖에서 문을 때린다.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한다. 꿈속에서 다시 그를 본다. 맨발로 눈 위에 서 있는 그를. 그 발에서 피가 흐른다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게 다가와서 손을 잡는다. 입 속에서 내 이름을 부른다 잠이 깨면 새벽종이 운다. 그 종소리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일어나 창을 열어 본다. 창 밖에 쌓인 눈을 본다. 눈 위에 얼룩진 그의 핏자국을. 그 성난 눈초리를. 07.12.28/밤 1시 20분 20 3월 1일 골목마다 똥오줌이 질퍽이고 헌 판장이 너풀거리는 집집에 누더기가 걸려 깃발처럼 퍼덕일 때 조국은 우리를 증오했다 이 산읍에 삼월 초하루가 찾아올 때. 실업한 젊은이들이 골목을 메우고 복덕방에서 이발소에서 소숫집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2008 필사 시 2021.01.20

고정희 시집....다섯째거리-- 길닦음마당

다섯째거리--길닦음 마당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느니 1. 사람의 길이 다 사람 안에 있으니 아하 사람아 본은 어머니요 그 뜻은 사랑이라 해동국 조선땅 팔만사천 사바세계 사람의 길은 다 사람 안에 있으니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고 가쁜 길이 있으면 평탄한 길이 있고 막막한 길이 있으면 안심하는 길이 있고 벅찬 길이 있으면 쉬어가는 길이 있고 혼자 가는 길이 있으면 함께 가는 길이 있고 외로운 길이 있으면 즐거운 길이 있고 고통스런 길이 있으면 편안한 길이 있고 달려가는 길이 있으면 살펴가는 길이 있고 주저앉는 길이 있으면 일어서는 길이 있고 질러가는 길이 있으면 돌아가는 길이있고 깜깜한 길이 있으면 환한 길이 있고 이별하는 길이 있으면 만나는 길이 있고 떠나가는 길이 있으면 돌아오는 길이 ..

2008 필사 시 2021.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