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필사 시 66

신경림 시전집 1...가난한 사랑노래

네 번째 시집 /가난한 사랑노래 1988년 실천문화사 153 너희 사랑 - 누이를 위하여 낡은 교회 담벼락에 씌어진 자잘한 낙서에서 너희 사랑은 싹텄다 흙바람 맵찬 골목과 불기 없는 자취방을 오가며 너희 사랑은 자랐다 가난이 싫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고 반 병의 소주와 한 마리 노가리를 놓고 망설이고 헤어지기 여러 번이었지만 뉘우치고 다짐하기 또 여러 밤이었지만 망설임과 헤매인 속에서 너희 사랑은 굳어졌다 새삶 찾아나서는 다짐 속에서 너희 사랑은 깊어졌다 돌팔매와 최루탄에 찬 마루바닥과 푸른옷에 비틀대기도 했으나 소줏집과 생맥주집을 오가며 다시 너희 사랑은 다져졌다 그리하여 이제 너희 사랑은 낡은 교회 담벼락에 씌어진 낙서처럼 눈에 익은 너희 사랑은 단비가 되어 산동네를 적시는구나 훈풍이 되어 산동네..

2008 필사 시 2021.01.21

내가 좋아하는 소월 시

개여울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 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물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 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約束)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08.02.03/오후 3시 8분 개여울 - 개울의 여울 개울 - 골짜기에서 흐르는 작은 내. 여울 - 강이나 바다에 물살이 세게 흐르는 얕은 곳. 헤적이다 - 무엇을 들추거나 벌리며 헤치다. 해작이다. 바람이 낙엽을 헤적이다. 헤작이기만 하고 밥을 먹지는 않았다. ▷ 않노라심은 : '않노라'와 '하심은'의 융합형. 개여울의 노래 그대가 바람으로 생겨났으면! 달 돋는 개여울의 빈 들 속에서 내 옷의 앞자락을 불기..

2008 필사 시 2021.01.21

신경림 시전집...151.152/세번 재 시집 [달 넘세] 끝.

151 너희는 햇빛이다 -숙대신문 창간 스물여섯 돌에 너희는 울타리다 오천의 새 꽃 천둥 비바람으로 지키는. 너희는 햇빛이다 이 꽃들 일제히 눈떠 재잘거리게 하는. 너희는 바람이다 이 꽃들 서로 엉켜 뛰고 뒹굴고 내달리게 하는. 어느날 그 어느날 맵찬 비바람 몰아쳐 너희들 울타리 무너뜨리기도 했지만, 검은 먹구름이 일어 햇빛 가리기도 했지만, 더 모진 바람이 너희 바람 숨죽이게도 했지만. 너희는 아우성이다 이 모든 것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는. 때로 너희의 선배들이 깊은 골방에서 더러운 거래하며 그렇다, 힘없는 눈짓으로 이것이 사는 길이다 한숨 질 때 너희는 불꽃이다 뿌리쳐 거부하며 참된 것 올바른 것 찾는. 스물여섯 해 그것은 아픔의 세월이었다. 때로 그것은 어둠의 나날이었다. 너희는 동산에서 밟히는 꽃..

2008 필사 시 2021.01.21

외상값 / 신천희

외상값 / 신천희 어머니 당신의 뱃속에 열 달동안 세들어 살고도 한 달치의 방세도 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몇 년씩이나 받아먹은 따뜻한 우유값도 한 푼도 갚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 이승에서 갚아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저승까지 지고 가려는 당신에 대한 나의 뻔뻔한 채무입니다 08.02.02./ 낮 12시 51분 어머니가 방세를 받으려고 방을 놓은 것도 아니고 우유값을 받으려고 우유를 먹인 것도 아니지만 세를 살고 우유를 먹었으면 먹은만큼은 몰라도 다만 몇 분의 일이라도 돌려드려야 하는데 그 또한 여간 어렵지가 않습니다. 전생의 부모가 현생의 자식으로 환생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래서 그럴까요. 다들 자식들에게는 없는 거 없이 잘해주고 있지요. 저도 한때 부모에게서 받은 것은 자식에게 내려주는 것이라 생각을 ..

2008 필사 시 2021.01.21

신경림 시선집 1...145.146.147.148.149.150

145 친구여 지워진 네 이름 옆에 미루나무 아카시아나무 빽빽한 언덕에서 파도 달려와 몸통에 부딪는 방파제에서 이 아침의 해돋이에 그대들 환호할 때 황홀한 빛줄기에 그대들 발구를 때 아직 어둠 가시지 않는 골방에서 우리는 빛바랜 헌사진첩을 뒤적여 잃어져 끝내 돌아오지 않는 친구여 네 옛 얼굴을 찾았다 비들기 날개치며 날아오르는 광장에서 하늘 가득히 불꽃 터지는 거리에서 그대들 쉰 목소리로 노래하고 소리칠 때 어제까지의 원수와 팔 끼고 춤출 때 친구여 지워진 네 오랜 이름 옆에 우리들 서툰 이름을 적었다 내가 남기고 간 것은 피와 땀뿐이었는가 하지만 싸움은 이제부터라고 기름 묻은 손 작업복에 문지르고 흙 뭍은 석탄 손 서로 엉켜 외진 광산 먼 산역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 지난 어둠 말끔히 씻은 기쁨에 들떴을..

2008 필사 시 2021.01.21

신경림 시선집 1....139.140.141.142.143.144

139 아아, 내 고장 내 친구 중에는 비행기 폭격에 맞아 죽은 아이가 있다. 아버지를 따라 이북으로 올라간 아이가 있다. 월악산에서 잡혀 십년 징역을 살고 나온 이가 있다. 행방불명 오년 만에 앉은뱅이가 되어 돌아온 이도 있다. 내 이웃 중에는 전쟁에 나가 팔 하나를 잃고 온 젊은이가 있다. 낙반사고로 반신불구가 된 광부가 있다. 땅 임자에게 여편네를 빼앗기고 대들보에 목을 맨 소작인이 있다. 집 나간 아내를 찾아 평생을 떠도는 엿장수가 있다. 이래서 내 친구 중에는 아예 세상을 안 믿는 이가 있다. 낮과 밤 없이 강과 산을 헤매이며 이를 가는 이가 있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멀리 떠나버리는 이도 있다. 아아, 그래도 이고싱 내 고장이라고 땅을 부둥켜안고 우는 이가 있다. 08.01.26/ 오후 2시..

2008 필사 시 2021.01.21

신경림 시선집 1...133.134.135.136.137.138

133 감나무 늑대가 자주 나온대서 늑대골 거기서 그는 아내를 만났다 눈 하나 찌그러진 황아장수 그 홀아비와 천더기 딸. 첫째 낳고 둘째 낳고 운동회다 환갑잔치다 사타구니 불나게 술통 나르고 난리 겪어, 물난리 겪어. 그 통에도 울 뒤에 감나눔 심어 곶감 깎고. 벅차고 고달팠지만 그래도 세상살이엔 기쁨이 더 많아서. 감나무 고욤나무 사이로 뜨는 달은 아름다웠다 다투고 풀고 다시 싸우다 보면 찬 하늘에 어느새 새빨간 감만 대롱댔는데. 모두가 물에 잠겼다 타관 객지땅 지게품으로 떠돌다 돌아와 보니 대롱대는구나 새빨간 감만이 매다려. 찬 하늘에서 까마귀만 울고 기쁨도 다툼도 눈물도 물에 잠겨 아아, 사는 일 그 모두가 물에 잠겨서. 08.01.25/ 밤 11시 58분 134 시골 이발소에서 금간 거울 속에 빛..

2008 필사 시 2021.01.21

신경림 시선집 1...127.128.129.130.131.132

127 편지 시골에 있는 숙에게 신새벽에* 일어나 비린내 역한 장바닥을 걸었다. 생선장수 아주머니한테 동태 두 마리 사 들고 목롯집에서 새벽 장꾼들과 어울려 뜨거운 해장국을 마셨다. 거기서 나는 보았구나 장바닥에 밴 끈끈한 삶을, 살을 맞비비며 사는 그 넉넉함을, 세상를 밀고 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생각느니보다 삶은 더 크고 넓은 것일까. 더 억세고 질긴 것일까. 네가 보낸 편지를 주머니 속으로 만지면서 손에 든 두 마리 동태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숙아, 나는 걷고 또 걸었구나. 크고 밝은 새해의 아침해와 골목 어귀에서 마주칠 때까지 걷고 또 걸었구나. 08.01.23/ 밤 11시 48분 *신새벽 어둑새벽 날이 밝기 어두운 새벽녁 128 세밑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뒤돌아본다. 푸섶길의 가없음을 배우..

2008 필사 시 2021.01.21

신경림 시선집 1...120.121.122.123.124.125.126

120 폐항 즐포에서 멀리 뻗어나간 갯벌에서 어부 둘이 걸어오고 있다 부서진 배 뒤로 저녁놀이 빨갛다 갈대밭 위로 가마귀가 난다 오늘도 고향을 떠나는 집이 다섯 서류를 만들면서 늙은 대서사는 서글프다 거리엔 찬바람만이 불고 이젠 고기 비린내도 없다 떠나고 버려지고 잃어지고…… 그 희뿌연 폐항 위로 가마귀가 난다 08.01.23/ 오후 5시 2분 121 남한강의 어부 청풍에서 매일 조금씩 물에 밀리다가 마침내 산중허리까지 쫓겨올라와서 움막을 쳤다 밤마다 바다처럼 넓어진 강에 나가 주낙을 치지만 건져올리는 건 잉어도 눈치도 메기도 아니다 달려올라오는 건 이 고장 사람들의 깨어지고 찢어진 꿈의 조각들뿐이다 잘난 사람들 서울사람들한데 밟혀서 짓뭉개진 꿈의 조각들뿐이다 08.01.23/ 오후 5시 4분 122 끈..

2008 필사 시 2021.01.21